[아산신문] 광복절을 앞두고 난데없는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전쟁의 직접적 계기는 뉴라이트 성향으로 알려진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 임명이다.
김 신임 관장은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선을 긋고 있다. 어제(12일) 오후 보훈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독립운동가를 폄훼하고 일제 강점기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의미로 말하는 뉴라이트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 광복회 등 독립유공자 선양 단체는 뉴라이트임이 분명하다는 입장이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일제시기 밀정이 자신을 밀정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나. 이 분은 일제강점기 우리 국민의 국적을 일본이라고 강변하는 사람"이라며, 사뭇 수위 높게 비판했다.
실제 김 관장은 보훈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종찬 광복회장과 면접에서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이 어디냐는 질문에 “일본”이라고 답변했음을 시인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부인해도 일본에 강제로 편입되어졌기 때문에 일본 국민이 되어 국제대회에도 일본 대표로 가야만 했고, 여행을 하려 해도 일본 여권으로 여행을 했어야만 했고, 이런 역사적 사실을 부정한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아픈 역사는 기억하되 거기서 주는 교훈은 뭐냐, 나를 빼앗겨서는 안되겠다고 강조하는 사람"이라고 강변했다.
김 관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회견에서 나온 발언을 살펴보면 뉴라이트와 역사인식이 맞닿아 있음이 드러난다.
뉴라이트의 기본인식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는 것이다. "국가는 영토, 국민, 주권 등 세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1919년엔 없었다. 따라서 1919년 건설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주된 줄기다. 김 관장의 발언도 '일제 강점기 당시 국가가 없었다'는 뉴라이트의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역사학계가 바라보는 건국시점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이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도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며 1919년임을 명시하고 있다.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패러독스
한편 뉴라이트는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했다며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추앙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승만 대통령 스스로 1919년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했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이와 관련,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난 이만열 숙명여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교수의 설명을 아래 인용한다.
"1948년 8월 15일이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수립이냐는 논란은 역사학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하고 민감한 쟁점이다. 그해 5월 10일 선거가 치러졌고, 5월 31일엔 국회가 열렸다. 국회의장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우리는 기미 혁명 3.1운동으로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말을 했다. (중략)
이승만의 발언은 큰 틀에서 보면 임시정부의 정통을 잇는다는 말이다. 제헌 헌법 서문에도 '대한민국은 3.1혁명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이러이러한 정부를 둔다'는 취지의 문구가 있으니 확인해 보라."
이어 이만열 교수는 이승만 스스로 1948년 건국 주장을 부끄러워했다고도 강조했다.
"이승만은 '1945년 연합국에 의해 해방되고 그 덕에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말하면 역사에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일제의 강포한 지배하에 있을 적에 그걸 뚫고 3.1 민주혁명 일으켜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이게 자랑스럽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승만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이 정도 역사의식 가졌으면 좋겠는데 이를 전혀 말하지 않는다."
위에 인용한 이만열 교수의 강연은 박근혜 정부 시절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한창이던 2015년 11월 나온 것이다.(기자는 현장에서 이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당시에도 뉴라이트 역사관을 반영한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가 있었지만 역사학계와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반발에 막혀 무산됐었다.
그런데 9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새삼 뉴라이트 논란이 불거진 건 또 하나의 역설이다. 더욱 역설적인 건 김형석 신임 관장이 바로 이만열 교수의 교재로 신학교에서 역사를 강의했다는 사실이다.
“배신은 한 번으로 족하다”
하나세정치신학연구소 박성철 소장은 오늘(13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총신대학교 재학 시절이던 1990년대 김 관장의 강의를 들었다고 밝혔다. (서울 소재 총신대학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 신학교다)
김 소장은 "김 관장이 총신대에서 강의할 때만 해도 미국 시각이 반영된 교회사가 아닌, 민족사관에 기반을 둔 기독교 역사를 가르쳤다. 그때 김 관장이 사용한 교재는 이만열 교수의 저서"라고 밝혔다.
하지만 김 소장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김 소장의 말이다.
"김형석 관장의 관점은 2000년대 들어 일제 강점기 근대화론으로 관점을 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진보적 역사관으로는 자리잡기 어려운 한국교회 분위기 때문이라고 본다. 하지만 역사학자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학문의 방향을 튼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에게 강의를 들었던 90년대 학번들도 김 관장의 최근 행보에 분노한다. 그런데 김 관장이 이제 독립기념관 관장이 되니 이제와선 또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한다. 변절은 한 번으로 족하다."
앞서 적었듯 1948년 건국절 논란은 이미 박근혜 정부 시절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좌절되면서 한 풀 꺾였다. 그러던 것이 윤석열 정부 들어 다시 고개를 드는 양상이다.
그런데 이번 뉴라이트 논란은 차원을 달리한다. 뉴라이트 성향 인사들이 독립기념관은 물론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국사편찬위원장·한국학중앙연구원장 등 한국학 관련 국책연구 기관 기관장으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왜곡된 역사인식을 가진 이들이 국책 연구기관장을 맡아 국민 혈세로 왜곡된 역사인식을 정교화할 기회가 열렸다는 말이다.
이제 결론이다. 뉴라이트가 1948년 건국절을 주장하는 데 대해 역사학계는 '일제 강점기하에서 대한민국이 근대화됐고 이를 바탕으로 1948년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당화 하기 위한 시도라고 본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과 분단, 군사독재와 이에 맞선 민주화 투쟁의 역사는 시야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에 대해 이만열 명예교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당시 묵직한 문제의식을 던졌다. 뉴라이트 성향 인사들이 국책 연구기관에 이어 독립기념관 관장까지 '꿰찬' 지금, 이 문제의식은 다시 한 번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국정화 싸움은 우리나라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전통 위에서 세워졌느냐, 아니면 친일·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해 세워졌느냐 하는 싸움에 서 있다.
1987년 헌법은 4.19민주혁명 이념 강조하고 민주국가를 이뤄간 데 대한 신념을 강조한다. 특히 대한민국은 독립운동 전통 위에서, 민주화 전통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평화통일로 이끌어가야 한다고 명시했다.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 4.19혁명으로 시작돼 광주 민주항쟁, 1987년 6월 혁명에 이르는 민주혁명의 전통 위에서 한국을 이끌어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전두환 독재와 부패세력에 의해 발전된 것으로 대한민국을 이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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